태조 고황제 어진(太祖 高皇帝 御眞)

   (건원릉 능침)

 

 

(건원릉 전경)

 

 

(건원릉 비각)

 

(건원릉 신도비)

 

 

(건원릉 신도비)         

 

 

건원릉 신도비 명 역문

(태종9년 기축4월 기묘일에 세웠다.)

 

하늘이 덕 있는 이를 보살펴서 종은 다스림을 펼치려고 하면 반드시 이상함을 먼저 나타내어서 그 1)부명(符命)을 드러내었다.

그리하여 하우(夏禹)가 현규(玄圭)를 2)바침이 있었고 주(周)나라엔 3)점괘(占卦)에 맞는 꿈이 있었다. 한(漢)나라 이후에도 대(代)마다 있었는데, 모두 하늘이 준 것이고 사람의 꾀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우리 태조대왕이 용연(龍淵)에 있을 때 공덕이 이미 높았고 부명(符命)도 또한 나타났었다. 꿈에 신인(神人)이 금 자(金尺)를 가지고 하늘에서 내려와서 주며 『공은 이것을 가지고 나라를 안정시키시오』했다. 이것은 하(夏)의 현규(玄圭)와 주(周)의 맞은 꿈과 꼭 같다고 할 만하였다. 또 이인(異人)이 문간에 와서 책을 바치며 『지라산 바윗돌속에서 발견했는데, 목자(木子)가 삼한(三韓)을 고쳐 바룬다는 말이 있습니다.』하였다. 사람을 시켜 나가서 맞이하도록 했더니 벌써 가고 없었다. 4)서운관(書雲觀)에 옛날부터 갈무리되어 있는 비기(秘記)에 목(木)을 세워서 자(子)를 얻는다라는 것이었다. 조선이 즉 진단이란 말이 수천년전부터 나왔는 바, 지금에 와서 징험(徵驗)되었으니 하늘이 덕 있는 이를 보살펴 도움이 참으로 증거 있도다. 신이 삼가 선원(璿源)을 상고하니 리씨는 전주 망성(望姓)이었다. 사공(司空) 휘 한(諱翰)이 신라에 벼슬하여 종성(宗姓 : 왕실의 성)의 따님에게 장가갔고 여섯 대를 내려와 긍휴(兢休)에게 이르러 비로소 고려에 벼슬하였다. 십삼대를 지나 황고조(皇高祖) 목왕(穆王)은 원나라에 들어가 벼슬하여 천부(天夫)의 장(長)이 되었고 사대가 벼슬을 이어 받아서 다 아름다운 기질을 받았다.

 

원나라 정사(政事)가 쇠약(衰弱) 해지자 황고(皇考) 환왕(桓王)이 고려에 돌아와서 공민왕(恭愍王) 때에 벼슬을 하였다. 지정 신축년(至正辛丑年)에 홍건적(紅巾賊)이 왕경(王京)을 함락(陷落)하여 왕이 남쪽으로 옮겨가면서 사신(使臣)을 보내 극복(克復)하도록 했는데, 우리 태조께서 맨 먼저 첩서(捷書)를 바쳤다. 명년 임인(壬寅)에는 호인(胡人) 납합출(納哈出)을 공결해서 국경 밖으로 좇아 내었고, 또 다음해 계묘(癸卯)에는 가짜 왕 탑천목(塔帖木)을 물리쳐 좇았다. 공민이 믿고 기댐이 더울 무거웠고 벼슬을 여러번 옮겨서 장상(將相)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조정과 외방에 나갔다가 들어왔다가 하였다. 경사(經史) 읽기를 즐겨하며 열심히 하여 게으름이 없었다. 세상을 구제(救濟)하는 도량(度量)과 살피기를 좋아하는 덕이 천성(天性)에서 나왔다. 공민이 죽자 딴 성씨가 왕위(王位)를 훔치고 권간(權奸 : 권세를 잡은 간신)이 국정(國政)을 제 멋대로 하여 조종을 어지럽히니, 바다 도적이 깊숙이 들어와서 근현(郡縣)을 분탕질하였다.

 

홍무 경신년에(洪武庚申年)에 우리 태조가 운봉(雲峯)에서 싸워서 이기니 동남쪽 백성들이 편하게 살게 되었다. 무진년(戊辰年)에 시중(侍中) 최영(崔瑩)이 권간을 잡아 죽이면서 지나치게 참혹하게 했는데 우리 태조를 힘입어서 살아난 자가 제법 많았다. 영이 이에 태조를  시중으로 삼고 이어 우군 도통절원(右軍都統節鉞)을 주며, 요동(遼東)을 공격하도록 억지로 보냈다. 군사를 이끌고 위화도(威化島)에 갔다가 여러 장수를 앞장서 거느리고,  의리(義理)를 앞세워서 군사를 돌렸다. 그런데 군사가 언덕에 다 오르자 큰 물이 덥쳐와서 섬이 잠겨 버리니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 최 영을 잡아 내쫓고, 명유(名儒) 이 색(李穡)을 좌시중(左侍中)을 삼았다. 이때에 권간이 정사를 어지럽히고 광패(狂悖)한 자가 사단(事端)을 얽어 꾸미니, 형세가 아주 위태하게 되어서 화란(禍亂)을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런 때에 우리 태조의 시국(時局)을 전이(轉移)하신 힘이 없었더라면 온 나라가 위태했을 것이다.

색(穡)이 이르기를 『지금 공이 한번 일해서 중국(中國)을 높였으나 집정(執政 : 정권을 잡음)이 친히 조회(朝會)하지 않아서는 불가피하니 빠른 시일에 중국 서울에 가십시요』하였다. 태조는 여러 아들중에 주상전하(主上殿下)를 택해, 색과 더불어 중국 조정에 함께 가도록 했다. 조정에 들어가니 고황제(高皇帝)가 아름답다고 칭찬해서 돌려 보냈다. 기사년(己巳年) 가을, 황제는 딴 성씨가 왕으로 되었음을 책망하였다. 태조께서 여러 장수와 서로 추천(推薦)해 뽑아서 왕씨의 종친(宗親) 정창군 요(定昌君瑤)를 왕으로 세우고정사를 마음껏 도왔다. 전지 사유제도(田地私有制度)를 혁파(革罷)하고, 쓸모없는 관직(官職)을 도태(淘汰)하니, 민정(民情)이 다 기뻐하였다. 공이 높자 꺼림을 받아 간사한 참소가 번갈아 읽어대니 정창(定昌)이 제법 의혹(疑惑)하였다.

 

태조께서 5)성만(盛滿)하다는 것으로써 6)노퇴(老退)하기를 청했으나 물러가지 못했다. 마침 서쪽으로 행처했다가 병에 걸려서 돌아오니 도모하던 자의 책동(策動)이 더욱 급했다.

 

우리 전하께서 사기(事機)에 따라 변란(變亂)을 제압(制壓)하니, 도든 모략(謀略)이 기와 부스러지듯 하였다. 홍무 임시년(洪武壬申年)가울, 7월 16일 전하께서 대신(大臣) 배극렴(裵克廉) 조준(趙浚)등 52인과 더불어 창의(倡義)해서 추대(推戴)하니 신료(臣僚)와 부로(父老)가 의논하지 않아도 뜻이 다 같았다. 태조께서 변고(變故)를 듣고 놀라 일어나서 두세차례 굳게 사양하시다가 할 수 없어 왕위(王位)에 올랐다. 7)당폐(堂陛)에 내려가지 않았으나 방국(邦國: 국가)으로 변화했으니, 하늘이 덕 있는 이를 도운 것이 아니라면 어찌 능히 이와 같으랴. 이에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조 반(趙胖)을 중국에 보내서 주문(奏聞)하였다.

 

황제(皇帝)가 조서(詔書)하기를, 『삼한 백성이 이미 리씨(李氏)를 높혀서 백성이 병화(兵火)를 겪지 않았고 사람은 하늘의 즐거움을 즐기니 이것은 상제(上帝)의 명(命)이다.』하였다. 잇달아 또 칙서(勅書)가 있어 나라 이름을 무엇으로 고쳤는가 하였다. 곧 예문관학사(禮文館學士) 한상질(韓尙質)을 보내서 주청(奏請)했더니 조서하기를 『조선(朝鮮)이라는 호칭(號稱)이 아름다우니, 그 이름을 근본오로 하라. 하늘을 본해 백성을 다스리면 후사(後嗣)가  길이 창성(昌盛)하리라』하였다. 우리 태조의 위엄과 의기(義氣)가 위로 들려서, 황제의 마음에 새겨 있었기 때문에 명(名)을 청할 때마다 문득 8)유음(兪音)을 받았다. 이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삼년을 지나, 갑술년(甲戌年)여름, 황제에게 우리나라를 헐뜯는 자가 있어, 황제가 친남(親男 : 아들과 같다.)을 보내도록 명했다.

태조께서는 우리 전하가 경사(經史)에 능통하고 사리에 숙달하여 어느 아들보다 어질다는 것으로써 곧 보내서 응명(應命)하였다.

중국 서울에 도착해서는 사리를 부연(敷衍)해서 아룀이 황제의 생각에 꼭 맞으니, 후한  예(禮)로 대우해서 돌려 보냈다. 그해 겨울 11월 한양에다 도읍(都邑)을 정해 궁실(宮室)과 종묘(宗廟)를 영건(營建)하였다. 이미 사대를 추존(追尊)해서 황고조(皇高祖)는 목왕(穆王)으로 배위 이씨는 효비(孝妃)로 삼고 황증조(皇曾祖)는 익왕(翼王)으로 배위 최씨는 정비(貞妃)로 삼았으며 황조(皇祖)는 도왕(度王)으로 배위 박씨는 경비(敬妃)로 삼고 황고(皇考)는 환왕(桓王)으로, 배위 최씨는 의비(懿妃)로 삼았다. 예락(禮樂)을 정리해서 제사(祭祀)에 삼가고, 복장을 제정(制定)해서 등위(等位)를 분별하며 학교를 세워서 인재(人才)를 육성(育成)하고 봉록(奉祿)을 후(厚)하게 해서 선비를 권장(勸獎)하였다. 옥송(獄訟)을 분별해 결단하고 수령(守令)을 조심해 뽑았다. 나쁜 정사(政事)를 모두 없애서 모든 일이 다 화합하니 바다 도적이 와서 항볼하여 사경(四境)이 안심하고 살았다. 우리 태조의 높고 큰 덕은 참으로 이른바, 하늘이 내린 용·지·총·명·신·무·웅·위(勇知聰明神武雄偉)한 임금이다.

 

간신(奸臣) 정도전(鄭道傳)이 표문(表文)에 잘못을 저질러서 중국 조정에 견책(譴責)을 당하고 명령을 거역(拒逆)하기를 가만히 도모하였다. 무인년(戊寅年) 가을 8월 우리 태조께서 편찬은 틈을 노려서 어린 얼자(孽子 : 서자)를 끼고 제 뜻대로 하고자 했다.

 

우리 전하께서 기미(機微 : 낌새)를 밝혀 죽여 없애고 적자(嫡子)이고 장자(長子)라는 것으로서 상왕(上王:정종)을 세워서 세자(世子)삼기를 청했다. 9월 정축일(丁丑日) 태조께서 병환이 낫지 않음으로서 상왕에게 선위(禪位)하였다. 상황께서는 대(代)를 이을 후사(後嗣)가 없고 또 나라를 개창(開刱)하고 사직(社稷)을 안정 시킴 것이다. 우리 전하의 공이라 해서 이에 세자(世子)로 책봉(冊封)하였다. 경진년(庚辰年) 가을 7월 기사일(己巳日), 테조께서 계운신무 태상황(啓運神武太上王)이라는 칭호(稱號)를 바쳤다. 그해 11월 계유일(癸酉日) 상왕도 또한 우리 전하에게 서위한 다음 사신을 중국 조정에 보내어 황제(皇帝)의 명을 청했다. 영락원년(永樂元年)여름 4월 황제가 도지휘사(都指揮使) 고득(高得)등을 보내 조서(詔書)와 인장(印章)을 가지고 와서 우리 전하를 국왕(國王)으로 봉했다. 잇따라 한림대조(翰林大詔) 왕연령(王延齡)등을 보내와서 전하에게 곤룡포(袞龍袍)와 면관류(冕旒冠)등 9)구장(九章)을 하사(下賜)하여 작질(爵秩)로 친왕(親王 : 황제의 아들)같게 하였다.

 

우리 전하는 양궁(兩宮 : 태조와 정종)을 봉양(奉養)함에 정성과 공경이 갖추어 지극하였다. 영락무자년(永樂戊子年) 5월 24일 임신(壬申) 태조께서 승하(昇遐)하셨는데 춘추가 74세였다. 왕위에 있은 지 7년이고 늙음으로써 정사를 보지 않은 지가 11년이었는데 10)궁검(弓劒)을 문득 남기시니 아아! 애통하여라. 우리 전하의 애모(哀慕)함이 망극(罔極)하여 11)양암(諒闇)에서 예(禮)을 다했다. 12)책보(冊寶)를 받들어 태조에게 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라는 시호(諡號)를 올렸다. 이해 9월 초9일 갑인(甲寅) 성(城) 동쪽 양주읍(楊洲邑) 검암산(儉巖山)에 장사하여 능호(陵號)를 건원(建元)이라 하였다. 부음(訃音)을 전하자 황제가 매우 슬퍼하여 조회를 중지하고 곧 예부랑중(禮部郞中) 임관(林觀)등을 보내 13)태뢰(太牢)로써 제사를 했다. 그 제문(祭文)에 대략 『왕은 사리에 밝게 통하고 착함을 좋아함이 천성에서 나왔다. 천도(天道)를 공경하게 순종해서 충성과 의리를 다했고 공손하게 대국(大國)을 섬겨서 한 방면(方面) 백성을 보호애휼(保護愛恤)하였다. 우리 황고(皇考)께서 그의 충성을 매우 아름답게 여겨, 국호(國號)를 조선으로 회복시켰다. 왕의 나타난 공덕은 비록 옛 조선의 어진 임금 일지라도 이보다 더 났지는 않다』하였다. 또 14)고명(誥命)을 내려서 시호를 강헌(康獻)이라 했다. 또 전하에게 칙서를 내리고 부물(賻物)이 특히 풍조하였다.

 

총이(寵異)한 전례(典禮)가 갖추어 지극하여 섭섭함이 없었다. 대개 우리 태조께서 하늘을 두려워한 정성과 전하께서 부모의 뜻을 잇따라 효성이 전후에 서로 이어서 능히 천심(天心)을 샀기 때문에 시작하고 마치고 하는 동안에 천인상하(天人上下)의 도읍을 크게 얻었음이 이와 같이 지극하였다. 아아! 훌륭하여라. 첫째 비(妃) 한씨(韓氏)는 안변세가(安邊世家)로서 증 영문하부사(贈領門下府事) 안천부원군(安川府院君) 휘 경(卿)의 따님인데 먼저 별세했다. 처음 시호는 절비(節妃)였고 그후 승인순성신의왕후(承仁順聖神懿王后)로 시호를 더 올렸다. 여섯 아들 두 딸을 두었는데, 상왕(上王 : 정조)이 둘째이시고 전하는 다섯째 분이시다. 맏이 방우(芳雨)는 진안대군(鎭安大君)인데 먼저 별세했다. 셋째 방의(芳毅)는 익안대군(益安大君)이고 또 먼저 죽었다. 넷째 방간(芳幹)은 회안대군(懷安大君)이고 여섯째 방연(芳衍)은 과거에 올랐으나 죽었고, 원윤(元尹)으로 추증되었다.

 

딸로서 맏이 경신궁주(慶愼宮主)는 상당군(上黨君) 이저(李低)에게 시집갔는데 본관(本貫)이 같은 리씨가 아니다. 다음 경선궁주(慶善宮主)는 청원군(靑原君) 심종(沈淙)에게 시집갔다. 다음 비 강씨(康氏)는 판삼사사(判三司事) 윤성(允成)의 따님이다. 처음 현비(顯妃)로 봉했다가 먼저 별세하여 시호를 신덕왕후(神德王后)라 했다. 아들 둘 딸 하나를 낳았다. 아들 맏이 방번(芳蕃)은 공순근(恭順君)으로 추증했고 다음 방석(芳碩)은 소도군(昭悼君)으로 추증했다. 딸 경순궁주(慶順宮主)는 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에게 시집갔는데 또한 본관이 다르다. 모두 먼저 죽었다. 상왕 비 김씨는 지금 왕대비(王大妃)로 봉했는데 증 문화시중(贈門下侍中) 천서(天瑞)의 따님이다. 후사가 없다. 우리 중궁(中宮) 정비(靜妃) 민씨(閔氏)는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시 문도공(諡文度公) 휘 제(霽)의 따님이다. 아들 넷 딸 넷을 나았다. 맏이는 세자(世子) 제(禔)이고 다음 호(祜)는 효령대군(孝寧大君)이고 다음은 충령대군(忠寧大君)이고 다음은 어리다. 딸 맏이 정순궁주(貞順宮主)는 청평군(淸平君) 이백강(李伯剛)에게 시집갔는데 본관이 다르다. 다음 경정공주(慶貞宮主)는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에게 시집갔고 다음 경안궁주(慶安宮主)는 길창군(吉昌君) 권규(權跬)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어리다. 진안군은 찬성사(贊成事) 지윤(池奫)의 딸에게 장가가서 아들 둘을 나았는데 맏이는 봉령군(奉寧君) 복근(福根)이고 다음은 원윤(元尹) 덕근(德根)이다. 익안대군은 증 문화찬성사(贈門下贊成事) 최인방(崔仁玤)의 딸에게 장가가서 아들 익평군(益平君) 석근(石根)을 두었다.

 

신이 역대(歷代)로 천명(天命)을 받은 임금을 보니 덕업(德業)의 훌륭함과 부명(符命)의 신기함이 서책(書冊)에 빛나서 조상때부터의 은덕(恩德)이 한이 없었다. 지금 우리 조선(朝鮮)이 새로 일어남에 있어 훌륭한 덕과 굳은 부명이 옛보다 더욱 빛났다. 이리하여 이미 그 위(位)를 얻고 또 그 수(壽)를 얻었다. 큰 기업(基業)이 우뚝하고 큰 복이 흘러내려 와 천지와 더불어 장구(長久)함이 마땅하리라. 신 근(臣 近)이 외람되게 비문(碑文)을 지으라는 명을 받아왔으나 감히 정력(精力)을 다해서 성덕을 펼쳐 찬양(贊揚)해서 밝은 빛을 드리우게 하지 않으랴마는 신의 필력(筆力)이 무디어서 훌륭한 아름다움을 발양(發揚)하여 성명(聖明)의 뜻에 꼭 맞게 하기에는 부족(不足)하다. 삼가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남아있는 공덕을 적어서 감히 절하고 조아리면서 명(銘)을 바친다.

 

                           길창군(吉昌君) 신 권 근(權 近)지음

 

 

<註>

 

 

1) 符命 : 하늘이 상서(祥瑞)로서 인군(人君)에게 알리는 명령

2) 玄圭를 바치다. : 중국 하우가 구주에 홍수를 다스린 다음 순임금에게 현규(검은옥돌)를 폐백으로 해서 일 마쳤음을 보고 했음.

3) 점괘에 맞는 꿈 : 주위 선조 강원이 곰 꿈을 꾸고서 점을 했더니 대인 남자를 낳을 꿈이라 했다는 고사.

4) 서운관 : 천문과 지리를 맡아서 관찰하던 관청

5) 盛滿 : 자신과 자손이 모두 높은 벼슬자리에 있어 부귀를 매우 누리는 것

6) 老退 : 벼슬하는 사람이 나이와 병이 있어 직무를 감당할 수 없다는 핑계로 물러 가는 것

7) 당폐에 내려가지 않다. : 뜰에 내려가는 수고로움도 하지 않았다는 말.

8) 兪音 : 신하가 아뢰는 말에 대해 임금이 답하는 말.

9) 九章 : 임금의 의복에다 아홉가지의 수(繡)를 놓은 것

10) 弓劒을 문득 남기다 ; 황제가 죽어서 하늘에 올라 가면서 활을 떨어뜨렸고 그를 교산에 장사 했는데 교선이 문어 졌을 때 그 관속에는 칼과 신발이 있을뿐인데에서 나온말. 즉 임금이 별세한 것을 말함

11) 諒闇 : 임금이 상을 당해서 거처하는 집

12) 冊寶 : 존호 시호를 올리는 글

13) 太牢 : 제사에 소 양 돼지를 통째로 바치는 것

14) 誥命 : 당대(唐代) 오품관 이상의 관리에 주던 사령(辭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