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仁城君 遺訓
恒存善心 항존선심 : 항상 착한 마음을 지녀
善事勿行 선사물행 : 착한 일을 부지런히 힘써 행하라.
勿存惡念 물존악념 : 사악한 마음을 지녀
或行惡事 혹행악사 : 혹시라도 악한 일을 행해서는 아니 되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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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성군 행장(仁城君 行狀 : 사람이 죽은 뒤에 그 사람의 평생의 행적을 기록한 글)
선조왕자 인성군께서는 휘(諱)는 공(珙)이시며 호(號)는 백인(百忍), 시호(諡號 : 임금이나 정승, 유현(儒賢)들이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칭송하여 주던 이름)가 효민(孝愍)공으로 1588년(선조21)음력 10월 29일 창경궁 별전에서 탄생하시었다. 어머니는 정빈민씨로 강화도호부사(都護府使 : ·조선시대의 지방관직으로 종3품이다.) 사준(士俊)의
따님이시다.
공(公)은 어릴 적부터 총명하심이 남다르셨으므로 상(上:선조)께서 베푸시는 사랑이 매우 도타우셨으며, 어머님의 가르침이 엄하시어 학업이 날로 진척되어 온갖 경전(經典 : 성현이 지은, 또는 성현의 말이나 행실을 적은 책)을 한번 보면 금방 외우셨으며, 장성하시면서 단정하고 중후하여 예법을 준행하시고 글씨를 쓰시면 자획이 단정하고 굳세었다.
12세에 인성군(仁城君)에 봉군 되시고 1603년에 의정부좌참찬(左參贊 : 조선 시대 의정부에 속한 정이품 문관 벼슬. 삼정승을 보좌하면서 국정에 참여하였다.) 승길(承吉)의 따님 해평윤씨(海平尹氏)를 부인으로 맞으셨다.
1610년(광해2) 사옹원(司饔院 : 왕의 식사나 궁중의 음식 공급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 종부시(宗簿寺 : 선원보첩을 편찬하고, 종실의 허물과 잘못을 규찰하는 일을 담당하던 관청) 도제조(都提調 : 육조의 속아문이나 군영 등에 두었던 정1품 자문직)와 종친부(宗親府) 유사(有司) 직임을 겸관(兼官)하셨는데 그 일처리가 공명하고 정직하여, 공(公)에
대한 인망(人望)과 그 덕을 숨기거나 가리기가 어려운 지경이었다. 그러나 정치는 날로 어지러워지고 큰 옥사에서 무함(誣陷 : 없는 사실을 거짓으로 꾸며 남을 함정에 빠뜨림 )을 받음으로 공은 병이되어 두문불출하시면서 오직 글씨와 그림으로 스스로의 즐거움으로 삼으셨다.
1623년 계해반정이 일어나 상감(인조)으로부터 매우 도타운 예우를 받으셨으나, 1624년 겨울에 역옥 공초에 얽힘을 당하여 다음해 음력 2월 25일 간성으로 유배되었고 그해 11월 12일 원주로 이배되어 다음 해 어머니 병환이 점차 위중하여지자 인흥군께서 상소하여 1926년 11월 1일 석방되었으나 서울에 당도하기 전에 돌아가시니 임종을 지켜보지 못하는 아픔을
겪으셨다.
1628년(인조6)에 유효림의 역모 공초 등에 또다시 얽힘을 당하여 대사간 정온(鄭蘊)이 아무 방증 없이 당부의 허실을 묻지 아니하고 처벌한다는 것은 부당하다는 주청에도 불구하고 정월 21일 진도(珍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고, 5월 14일 공론에 따라 자진(自盡)하명이 내려지니 공은 조용히 상복을 입고 북쪽을 향해 네 번 절하고, 여러 아들에게 “성조(聖朝 :
어진 임금이 다스리는 조정)가 천추만세 후에 만약 파천(播遷)하는 환난이 있으면, 반드시 호종(扈從) 해야 한다. 만약 왕조를 바꾸는 변난이 있으면 반드시 목숨을 바쳐 절의를 지켜야 한다“라고 말씀하시고, 5월 20일 41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상께서 부음을 들으시고 소찬을 올리게 하고, 상사(喪事)를 관비로 갖추게 명하시고, 예장(禮葬)을 베푸시어 따로 부의(賻儀)를 보내 예관이 제를 지내었다. 1628년 7월 20일 양주(楊洲) 선영에 사향(巳向)한 자리에 예장하였다.
공은 5남 2년를 두시니, 1남은 해평군(海平君) 길(佶) 2남은 해안군(海安君) 억(億 : 순화군의 양자로 갔다.) 3남은 해원군(해원군) 건(健), 4남은 해령군(海寧君) 급(伋) 5남은 해양도정(海陽都正) 희(僖)이다.
장녀는 부사(府使) 남수성(南壽星)에게, 차녀는 진사(進士) 심장경(沈長卿)에게 출가 하였다,
1637년 3월 23일 인조대왕의 하교로 죄적(罪籍)에서 깨끗하게 씻겨지고관작(官爵 : 관직과 작위)이 거슬러 회복되었으며, 여러 아들에게 직책이 제수되었다. 111년 후인 영조15년(1739) 5월 13일 “효민공(孝愍公)”으로 시호(諡號)를 받으셨다.
군부인 행장(郡夫人 行狀)
군부인(郡夫人) 해평 윤씨(海平 尹氏)는 시조 윤군정(尹君正)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의정부 좌참찬 승길(承吉)이시고, 어머니는 광주목사(廣州牧使) 박간(朴諫)의 따님이다.
군부인께서는 1588년 (선조21) 무자 7월 12일 탄생하시고 16세에 선조왕자 인성군 공(珙)과 혼인하여 5남 2녀를 두었시었다.
시어머니 모시기를 극진히 하고 부군(夫君)을 섬김에도 화목과 공경을 한결같이 하셨는데, 선조대왕께서 승하하시고 부군(夫君)께서 집권세력의 견제와 무함(誣陷)을 받으면서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고, 1628년 부군(夫君)께서 역옥(逆獄) 공초(供招)에 얽힘을 당하여 절해고도에서 생을 마감하시기 까지 그 옆에서 아픔과 고통을 함께하셨습니다.
그해 6월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안고 어린자녀들과 함께 제주도로 이치(移置)되고 이듬해 나이든 3형제를 제외하고는 구금에서 풀렸으나 모자 형제간에 서로 떨어져 살 수 없다며 8여 년간 제주도에서 갖은 고초를 다 겪으시면서 자녀들을 돌보셨으며,
1635년 12월 나이든 세 아들을 강원도 양양으로 양이(量移)하라는 명에 따라, 가족이 함께 26일 해로로 제주 별도포를 떠나 추자도를 경유 해창에 도착하여 육로로 전남, 충청, 강원 3도의 26관소를 지나 1천3백 여리를 가서 다음해 1월 26일 양양에 도착하기까지 많은 고초를 겪으시고 그해 9월 어린 자녀와 서울로 돌아오셨습니다.
1637년3월23일 인조대왕의 하교로 부군(夫君)의 관작(官爵)이 거슬러 회복되고 아들들에까지 직위가 제수되어, 정혼까지 하게 되니, 오랜 역경(逆境) 끝에 집안의 안정을 이루시고, 1655년 (효종6)을미 2월 19일에 향년 68세의 일기로 서거(逝去)하셨습니다.


(인성군묘소)

(인성군. 군부인 묘비)

(인성군 묘비 후면)

(인성군 신도비)

(인성군 신도비 후면)

(인성군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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